「칠레의 지진」or 지진에 대한 종교적 이해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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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스트의 「칠레의 지진」혹은 지진재난을 보는 시각
I. 일본 지진에 대한 이중감정
인터넷을 보면 지진재난을 겪고 있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심사가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이중적이다. 이런 걸 심리학에서는 애증의 양가감정(ambivalence)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웃 일본의 고통에 대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연민과 고소해함(Schadenfreude)이라는 시이소를 타고 있는 양상이다. 물론 저간의 한일관계를 보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다행히 공적인 매체를 보면 정 많은 한국인들의 측은지심이 해묵은 피해자의 앙금을 걷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여기에 다시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일부 기독교인들이 내던지는 언사가 양식 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저들은 일본의 대지진을 단순히 재난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나 복수로 생각한다. 이번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지진이나 쓰나미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란 노골적인 표현을 써 논란을 일으킨 크리스천들이 적지 않다. 물론 성경에도 지진을 그런 의미로 말하는 곳이 없지 않다. 그러나 무섭고 예측하기 어려운 자연현상을 신의 초자연적 역사로 해석한 것은 거의 대부분의 종교가 강조해 온 일이다. 지난해 아이티 지진 후 국가적인 차원에서 3일간의 금식기도회(부두교)를 열었을 때, 백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다만 자연현상에서 종교적인 함의(connotation)을 읽어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많은 경우 아전인수적 시각으로 위험을 야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찍이 지진을 소재로 인간들의 모순되고 부조리한 종교적 감정을 첨예하게 그린 작가가 있으니, 다름 아닌 Kleist라는 독일 사람. 한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1811)는 1807년에 「칠레의 지진」이란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독일 문학계에 지진해석이란 난해한 숙제 하나를 던져주었다. 작금의 일본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이 단편의 스토리를 좀 소개해 볼까 한다.
II. 「칠레의 지진」- 자연재난에 대한 인간들의 의식
1647년 칠레의 산티아고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역사적 사실에 근거)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각, 산티아고 감옥에는 기둥에 목을 매고 자살을 하려는 한 사나이가 있다. 제로니모라는 이름의 청년이다. 당시의 신분사회에서 볼 때, 별 볼일 없는 집안의 태생이지만 매우 영민한 젊은이다. 그래서 산티아고의 부유한 명문가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는데 그만 그 집의 외동딸(요세페)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실을 안 딸의 아버지는 제로니모를 즉각 쫓아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지 딸마저 수녀원에 넣어버린다.
그러나 운명인지 사랑의 끈이 강해서 그런지 얼마 뒤 제로니모와 요세페는 다시 만나 사랑을 일구어 나간다. 그러다가 소위 마지노선을 넘어가는데, 그것도 성스러운 수녀원 뜰에서 일을 내고 만다. 달이 차고. 모든 수녀들과 성직자들이 모여 엄숙한 미사를 드리는 성체축일에 요세페가 성당 계단에서 아이(필립)를 낳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 엄청난 스캔들은 삽시간에 도시를 퍼져나갔고 대주교의 명령 하에 준엄한 재판이 벌어진다. 요세페는 바로 화형선고를 받지만 많은 사람들의 탄원으로 간신히 참수형으로 완화된다. 요세페의 사형이 집행되던 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한다며 형장으로 몰려든다. 특히 경건하고 조신한 처녀들이 하늘의 복수극을 관람하겠다고 지방에서까지 올라온다.
요세폐의 처형 소식은 감옥에 있는 제로니모의 귀에도 들어간다. 자책으로 너무 괴로워하던 그가 사형 집행의 종소리와 함께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지진이 일어난다. 요세페의 참수형이 집행되는 광장뿐만 아니라 제로니모가 목을 매던 감옥까지 전 도시가 풍비박산이 된다.
지축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혼절해 버린 제로니모가 한 참 뒤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온통 폐허가 되어있고 눈길 가는 곳마다 사람과 가축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잠시 후 그러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서풍이 육신을 스치자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땅에 이마를 대고 하나님에게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생의 환희에 눈물을 쏟아낸다.
문득 손가락의 반지를 바라보며 애인을 생각한다. 참수형을 당해 저 세상으로 갔을 거라는 생각에 다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이번에는 원망의 기도를 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살아남은 사람들이 귀중품을 챙겨 들고 정신없이 도시를 빠져나가는지라 제로니모도 조심스레 대열을 따라간다. 혹시나 싶어 주위 사람들에게 요세페의 사형집행을 물어보니 죽었을 것이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다시금 깊은 상심에 빠진 제로니모는 어느 나무 밑에 주저앉아 왜 하나님이 자신을 구해주었는지 한탄한다. 기대고 있는 나무가 쓰러져 자신을 압사시켜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품는다.
그 후 제로니모는 어느 산골짜기에서 기적처럼 아이를 안고 있는 요세페를 만난다. 꿈인 지 생시인 지, 두 사람은 얼싸안고 감격에 젖는다. 지진으로 사형장이 박살이 나고 사형집행인들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요세페도 생명을 건진 것이다. 아이를 찾으러 수녀원으로 달려간 요세페는 처참하게 무너진 수도원 뿐 아니라 수녀원장과 주교의 시체까지 목격한다. 그런 와중에도 어린 필립이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 나아가 요세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법정도 전소되고 그녀를 수녀원에 감금시킨 아버지의 집도 웅덩이로 변해있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구원의 환희에 눈물을 흘리며 아이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부어댄다. 그날 밤 두 사람에게 계곡의 밤은 에덴동산이나 다름없다. 불어오는 바람은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하늘에서는 달빛이 교교히 흘러내린다. 땅은 나뭇잎과 부드러운 이끼가 깔려 더할 수 없는 안식처가 된다. 근처 숲에는 향기로운 열매로 가득한 사과나무가 있고 꾀꼬리가 환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신음하는 세상 한 복판에 신기루처럼 세워진 낙원이다. 거대 재난의 역설이다.
다음날 아침 잘 차려입은 한 귀족 남자가 아이를 안고 요세페에게 다가온다. 아이에게 젖 좀 물릴 수 없겠느냐고 묻는다. 아내가 다리를 다쳐 누워 있기 때문에 젖을 먹일 수 없어서 그렇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이 남자는 페르난도라는 귀족 명문가의 사람으로 요세페도 아는 사람이다. 두렵고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곧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말한다. "이 어려운 시기에 누가 자기가 갖고 있는 것 나누기를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페르난도는 감사의 말을 거듭 하며 자기 가족들이 있은 곳으로 가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요세페는 제로니모와 함께 페르난도 가족과 합류한다.
페르난도네 가족은 너무나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다. 두 가족은 금방 친척처럼 가까워진다. 얼마 전까지 악귀처럼 두 사람을 죽이려 달려들던 세상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다. 두 가족은 젖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데 내 것 네 것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런데 둘러보니 그것은 두 가족만의 모습이 아니라 피난 온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 모두 거대한 한 가족이 된 듯 서로 돕고 인정을 나누는데 자연의 무지막지한 폭력 뒤에 인간 정신은 오히려 찬란히 꽃을 피우고 있는 형국이다.
곳곳에 무리를 이룬 지진난민들 속에는 제후도 없고 거지도 없다. 성직자나 농부나 아무런 계급 구별도 없이 하나가 되어 서로 나누고 협력하며 행복한 공동체를 이룬다. 한 마디로 재난 속에 고도의 휴머니즘이 꽃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본 제로니모는 과거의 모든 염려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꿈꾼다.
얼마 뒤 산티아고의 도미니크 성당에서 감사의 미사를 올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 성당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지진의 피해를 입지 않은 의미심장한 건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당으로 몰려간다. 페르난도의 가족과 제로니모 가족도 미사에 간다. 이들이 성당 근처에 이르렀을 때, 장엄한 오르간 소리가 가슴을 압도한다. 성당은 마당까지 예배하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마침내 한 경건한 설교자가 강대상에 올라가 설교를 시작한다.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된 설교는 조금 지나자 지진을 주제화한다. 지진은 하나님의 경고이자 불경스런 산티아고 시민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라는 것. 도시의 죄악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하지만 모두 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한없는 인내심 때문이라는 등등.
더 나아가 설교자는 수도원의 스캔들을 곧바로 입에 올린다. 제로니모와 요세페의 가슴에 비수가 지나가는데, 누군가 갑자기 설교를 가로막고 외친다. "여기에 바로 그 불경스런 인간들이 있소!" 군중들은 일제히 소리 나는 데로 몰려든다. 페르난도의 아이(후안)까지 안고 있던 요세페는 머리채가 잡힌 채 땅 바닥에 쓰러지고 짓밟힌다. 요세페는 후안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절규하지만 사람들은 아이의 아버지도 찾아내라고 소리친다. "죄인들을 돌로 쳐 죽여라!" 당황한 페르난도가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요세페에게 아이를 건네받으려 하는데, 군중들은 페르난도가 제로니모인줄 알고 "하나님을 모독한 이 인간을 쳐 죽이자"고 달려든다.
결국 이 교회의 폭도들에 의해 제로니모와 요세페는 처참하게 맞아죽는다. 지진으로 인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다음 날의 일이다. 두 사람은 죽으면서 페르난도에게 말한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감당하겠으니 아이들만은 꼭 살려 주십시오." 페르난도는 두 아이를 안고 살기어린 군중 속을 어미 사자처럼 헤쳐 나간다. 그러나 성당 입구에서 폭도들과 싸우다가 자신의 아들 후안을 빼앗기고 만다. 피에 굶주린 한 사나이가 아이의 다리를 잡고 풍차 돌리 듯 빙빙 돌려 성당 기둥에 내팽개쳐 박살을 낸다. 아이의 머리가 박살이 나고 골수가 땅에 쏟아진다. 그 모습을 본 페르난도가 실성한 듯 허공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데, 그 모습에 갑자기 폭도들이 물러나고 주변이 조용해진다.
얼마 후 페르난도는 주위 사람들과 같이 시체를 치우고 귀가한다. 그날 밤 그는 아내와 함께 죽은 아들에 대한 애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자기들에게 아직 아들 하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두 사람은 고아가 된 필립에게 눈물의 키스를 퍼부으며 그를 양자로 받아들인다. 후안을 대신하여 새 아들을 얻은 페르난도 부부에겐 슬픔대신 기쁨이 자리한다.
III. 지진에 대한 종교적 해석의 위험
이 엽기적이고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말 하려 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클라이스트가 명시적으로 말한 것은 거의 없다. 알고 있다고 해도 작가가 그런 걸 말해 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클라이스트가 겪은 소위 '칸트 위기'란 걸 주목하며 세계의 불가해성이나 절대적 신앙에 대한 회의를 주제화한다. 즉, 클라이스트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논한 칸트의 철학에 영향을 받아, 인간은 진리 자체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앙에 대해서도 명확하고 보편적인 근거를 댈 수 없다는 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칠레의 지진」은 지진에 대한 어떤 종교적 해석도 비판하고 부정한다. 우선 지진으로 인해 기적처럼 살아남은 인물 제로니모의 속내를 보자. 수많은 시민들이 지진으로 희생된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구원에 환희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다. 지진이 자기 하나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했는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나마 감사의 마음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애인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갑자기 좌절에 빠져 다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한탄한다. 그러다가 살아있는 요세페를 만나자 다시 구원의 행복에 빠진다. 신에 대한 김정조차 기복이 팥죽 끓듯 한다.
요세페의 지진 이해도 제로니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진으로 인해 참수형을 면한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수녀원을 목격하고 자신은 하늘의 천사들이 보호해 주고 있다고 느낀다. 폐허 속에서 살아있는 아이를 발견했을 때는 하나님이 다시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에덴동산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감격한다. 두 사람은 밤새 전날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세상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고 있는지, 깊은 감동에 빠진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잊고 산티아고 시민들이 운집한 성당으로 가 예배를 드리던 중 희생을 당한다.
제로니모와 요세페의 반대편에서 지진을 해석하는 사람은 설교자와 폭도들이다. 이들은 산티아고에 일어난 지진은 바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인간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제로니모와 요세페의 불륜이 지진을 야기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들이 신의 대리자가 되어 사형을 기어이 집행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만 죽일 뿐 아니라 무고한 사람들까지 살해하고 심지어 갓난아이까지 무자비하게 죽인다. 이들은 제로니모와 요세페가 지진을 하나님의 구원과 화해의 의지로 해석한 것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무자비한 심판으로 해석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지진을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하여 극단적으로, 즉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두 그룹이 있는가 하면 중립적인 제 삼의 그룹도 있다. 즉, 「칠레의 지진」에서 가장 긍정적인 인물인 페르난도 부부가 그들이다. 이들은 지진이나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이나 하늘이란 단어를 일체 갖다 붙이지 않는다. 죄를 지어 사형선고까지 받은 제로니모 부부이지만 고난에 빠진 그들을 기꺼이 도와준다. 심지어 그들 때문에 아들까지 잃었지만 그들의 아이를 양자로 받아들이는 놀라운 인간애를 발휘한다. 소설 전체에서 페르난도는 한 번도 하나님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작가는 그를 "신적인 영웅 goettlicher Held"이라고 부른다.
물론 클라이스트가 이러한 페르난도를 윤리적인 모델로 내세우기 위해 「칠레의 지진」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연재해는 이리저리 아전인수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불가해한 것이고 인간은 그저 판단유보하는 겸손으로 무장하고 재난당한 자들에게 온정을 베풀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경규 / 한국오스트리아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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